장자, 플라톤, 니체, 지젝에 관하여
장자, 플라톤, 니체, 지젝에 관하여
내일 모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과목의 기말고사가 실시된다.
이에 문제를 내신다고 한 철학자 4명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플라톤과 니체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영원불변하고 초월적인 이데아라는 가치를 내세우는데에 반해 니체는 이러한 초월적인 가치를 해체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죽음으로써 영혼이 육체에서 해방된다고 플라톤은 본다.
영원이 소멸하지 않는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증
산 것은 죽은것에서 생겨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반대 속성으로부터 생겨난다. 따라서 삶은 죽음에서부터 생겨나야 한다. 영혼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소멸하지 않고 저승에 존재하다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 삶을 시작한다.
상기설: 현실 세계에서 완전히 동일한 것을 경험한 적이 없는데에도 우리는 보편적인 가치들을 경험한다. 이는 영혼이 이전에 배웠던 것으로, 현실 세계에서 다시 기억해내는 것에 불과하다. 현실세계에서의 배움은 이데아를 다시 상기해내는 것이다.
영혼은 신적이고 불멸하는 이데아와 닮았다. 세상의 존재는 두 종류로 나뉜다. 눈에 보이고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형체와,
눈에 보이지 않고 가장 단순한 형태인 이데아다. 복합적인 것은 소멸하기 쉽지만 이데아는 영원불멸한다.
영혼은 소멸하는 육체보다는 불멸하는 이데아와 더 가깝다. 그렇기에 소멸하지 않는다.
심미아스의 조화설: 영혼은 육체의 조화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고로 육체가 소멸하면 영혼도 소멸한다. 반론: 영혼은 종종 육체의 욕망에 반대한다. 이성으로 욕구를 억제하기도 하며, 육체에 영혼이 조화로써 나타나는 종속적인 것이라면 그 근원을 거스를 수 없다.
또한, 상기설과 모순된다. 만약 영혼이 육체의 조화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면, 영혼이 육체의 존재 이전에 나타나는 이데아들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렇다면 상기가 불가능하다.
케베스의 영혼 소멸설: 케베스는 영혼을 직조공에 비유한다. 영혼이 육체를 만들 수 있지만, 언젠가는 영혼도 닳아 없어진다. 반론: 영혼은 이데아를 가져오는 존재로 규정된다. 삶을 본질로하는 영혼은 죽음을 가져올 수 없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영혼)은 죽지 않는 존재다.
플라톤주의 비판
니체는 서양 철학의 역사를 퇴락의 역사로 규정한다. 그 시작점은 플라톤으로 보았는데, 순수 정신과 선 자체를 고안하는 것을 철학적 질병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서양 문명을 지배해온 기독교를 민중을 위한 플라톤 주의라고 보았다. 왜냐면 절대적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러한 것들을 문명사적 병리 현상으로 진단했다. 플라톤 철학처럼 참된 세계(이데아)를 설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의 감각적이고 생생한 삶을 거짓된 것으로 규정하는 행위로 본다.
니체 철학의 개념
- 권력에의 의지: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끊임없이 자신의 힘을 확장하고 더 강해지며, 주변 세계를 자신의 의지 아래 두려는 근원적인 충동이다.
- 운명애: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필연적인 일들(고통까지도)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태도다. 이때, 숙명론처럼 염세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 디오니소스적 긍정: 삶의 부정적인 부분들까지도 긍정하는 태도다. 파괴와 고통속에서도 생성을 사랑하는 태도로, 니체 철학이 도달하고자하는 최고의 경지다.
긍정을 시험하는 궁극적인 사상은 영원회귀다. 지금의 삶과 고통이 무한히 반복되어도 다시 살 것인가?
영원회귀 사상은 매 순간을 후회없이 온 힘을 다해 긍정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준다. 운명애를 실천하는 시험대다.
플라톤 vs 니체
| 주제 | 플라톤 | 니체 |
|---|---|---|
| 몸과 영혼 | 육체는 영혼의 감옥, 죽음은 영혼의 해방 | 위대한 건강은 병든 육체에서 생긴다 |
| 진리의 세계 | 이데아의 세계 | 진리에의 의지는 병적이며, 단순히 진리는 유용한 오류일 뿐이다 |
| 고통의 의미 | 육체에 속한 고통은 이성으로 이긴다 | 고통은 삶의 일부이며 운명애로 긍정, 삶의 자극제로 삼는다 |
| 철학의 목표 | 죽음을 준비하고, 영혼 불멸성을 깨닫는다 | 기존의 가치들을 부수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한다 |
장자
장자는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자유롭게 사는 삶의 기술을 세 가지 용어로 기술한다.
- 안시이처순: 때를 편안히 맞이하고 순리에 편안히 따른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평온한 경지에 이른다.
- 양생: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주어진 운명을 따른다. 천명을 거스르지 않는다.
- 허기이유세: 자신을 비워서 해를 입지 않는다. 자신을 채우는 욕망들을 비워내 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인간의 유형
| 유형 | 특징 | 한계 |
|---|---|---|
| 상식인 | 스펙에 얽매여 살아가는 사람 | 사회가 만든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함 |
| 송영자같은 사람 | 세상에 초연하지만 여전히 자신과 세상을 구분 | 여전히 의존적, 주체적이지 않음 |
| 열자같은 사람 | 세속을 초월했지만 여전히 조건에 의존 | 특정 조건에 의존하는 상태 |
| 지인,신인,성인 | 자신도, 공적도, 이름도 없음 |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음 |
지젝
현실과 리얼을 구분해야 한다.
- 현실: 안전하다 여기는 언어와 이미지로 구성된 사회적 질서, 통념
- 리얼: 현실이라는 환상으로 가려진 블랙홀,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트라우마적 공백, 죽음 등(충격과 공허함)
당연하게 느끼는 객관적인 현실이란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불과하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다.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내가 욕망하는 이유는 진정으로 내가 욕망해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만들어낸 욕망들을 따르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부모, 사회, 미디어같은 “큰 타자”가 욕망하도록 가르쳤다.
성공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느끼는 죄책감은 사회가 나에게 심은 가짜 욕망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삐딱하게 보기
사회가 강요하는 환상에 저항하는 기술로, 삐딱하게 보기가 있다.
삐딱하게 보기는 무조건적인 부정이 아니라, 사회가 강요하는 성공 신화나 인정 윤리에 딴지를 걸고 현실에 균열을 내어 노예가 되지 않으려는 실천적 태도다.
지젝은 슬럼프나 심리적인 증상들을 병으로 보지 않고, 현실 속에서 미치지 않고 버티게 해주는 주체의 방식이므로 오히려 즐겨야 한다고 한다.
이효리가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 것은 큰 타자에 얽매이지 말라는 예다.
| 철학자 | 진단하는 문제 | 제시하는 해결책 | 삶의 태도 |
|---|---|---|---|
| 장자 | 삶과 죽음, 좋고 나쁨 등 인위적 구별과 집착에서 오는 고통 |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고 자아를 비우기 | 수용과 초월 |
| 니체 | 삶을 부정하는 병든 도덕과 허무주의 |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긍정하기 (Amor Fati) | 적극적 긍정 |
| 지젝 | 우리를 지배하는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환상과 가짜 욕망 | 현실을 삐딱하게 보고, 기존의 정체성을 파괴하기 (상징적 죽음) | 비판적 저항 |